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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탕마 님 ◆

태양의 눈물 ​

     이 기억은 전사들의 설원, 순례자들의 안식처, 열대의 정열과 황금의 나라가 아직 존재하던 고대의 편린이다. 오래전 일을 다시 떠올리는 이유는 유독 기억에 남는 대화 때문이다. 한창 여행을 다니던 시절, 그날은 갑작스러운 비가 내렸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하늘이 맑았기에, 가히 봉변에 가까웠다. 반죽이 눅눅해지는 것만은 사양이었던 나는 급하게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주위에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비를 많이 막아 주었다. 십몇 분이 지나고서야 겨우 조그마한 동굴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짐을 급하게 밀어 넣고 동굴에 쪼그려 앉았다. 비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 더러운 돌바닥에 문대지고 있었다. 온몸에서는 젖은 흙내음이 났다. 이런 저 자신의 꼬락서니가 불쾌할 만도 하려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설원에서 홀로 길을 잃어버렸을 때만큼 고독하지 않았다. 돌에 낀 이끼와 이름 모를 잡초들이 모여서 생기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비에 적셔진 식물들은 유독 생명력이 넘쳐 보인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했다. 나의 모든 것은 내 고향, 그 외로운 설원에 있는데도. 

 

     잠시 감상에 빠진 사이에, 예민한 귀가 발걸음 소리를 잡아냈다. 잠시 숨을 죽이고 인기척에 신경을 집중했다. 나는 느릿하게 손을 검으로 옮겼다. 이윽고 기척의 주인이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허름한 차림새에 배낭을 메고 있었다. 비도 오는데 뭐가 그리 여유가 나는지, 건들거리는 모양새가 세상을 등진 한량 같았다. 무술을 배운 태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 모습에 난 손을 검에서 떼고, 멈췄던 숨을 그제야 놔줬다. 그리고 외침으로 내 존재를 알렸다. 

 

"이봐! 여기야, 여기!" 

 

     잠시 넋을 놓던 나그네에게 손짓하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이내 팔을 흔들어가며 뛰어오는데 자세가 영 별로였다. 정말 제대로 된 훈련이 되지 않은 일반인이다. 전사들의 나라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참 적응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몇 분이 지나고서야 동굴에 도착한 나그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화색을 띤 얼굴로 날 보았다. 나그네가 꺼낸 말을 필두로 그와 나 사이에는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유랑하는 시인이라 아름답고 섬세한 말하기를 즐겼다. 나는 전사였고, 추상적인 표현은 전투 중 사용하는 구호 정도나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호응은 했다만 솔직히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그는 딱히 나에게 깊은 공감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간혹 반응이 없을 때도 상관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뒤에 가서는 고개만 끄덕였다. 참 재미없는 시간이었지만, 이 모든 걸 다시 떠올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화의 끝자락,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던 때에, 그가 나에게 꺼낸 질문이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물음은 이러했다:

 

"태양도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왜지?"

 

"태양이 그런 우울한 모습을 보여서 어디 쓰나."

 

"꽉 막힌 대답일세."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야."

 

     그 뒤로 내가 말한 기억은 없다. 소나기가 그쳤기 때문이다. 시인과 나는 각자 갈 길을 갔다. 참으로 짧은 인연이었다. 사실 이 대화는 그다지 유별나지 않았다. 시인의 이야기에 어울려 준 유일한 순간이라는 점 빼고는. 실제로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정작 고대의 시와 노래가 잊혀가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이 났을 뿐이다. 태양은 눈물을 흘리나. 아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태양의 의미는 먹구름을 개고 빛을 되찾는 것이니까. 눈물 같은 걸 흘려서야 반죽이 바삭할 새가 없을 것이다. 그게 나의 변치 않는 결론이었다.

 

. . .

 

     벼락을 맞아 까맣게 타 버린 대지에 너와 내가 서있었다. 내 손에 쓰러진, 너가 지키지 못한 참사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그래도 아직 숨은 붙어 있나.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도 나아진 것이 없다. 아직도 과거에 눈 멀어 일을 그르치는 건가. 아니, 어쩌면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과거를 아는 자와 대면하는 것은 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동경한다 말하는 이는 더더욱. 떨려오는 손을 꽉 쥐고 상대를 본다. 눈앞에 앳된 얼굴은 결연했다. 그래, 결연하면서도 여리고, 순진하면서도 용기로 가득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눈이었다. 언젠가 예전에 내가 가졌었던 눈. 혐오스러운 과거의 업보로, 더이상 가질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는 나의 조각. 그것을 너는 계승했다 말하고 있었다. 참을 수 없다. 네가 아니고, 그런 너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나의 어리석음이 말이다. 붉은빛을 방사하는 마검을 고쳐 쥐었다. 네 심장을 찔러야 이 설렘이 사라질 테지. 그렇다면 나는 검을 들어야 한다. 오로지 그걸 위해서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꺾으려 한다니, 이래서 내가 당신의 아들이었나. 속으로 자조하며, 일그러진 얼굴을 향해 대검을 내리친다.

 

​쾅!

 

     어느새 앞으로 들이밀어진 방패에 공격이 막혔다. 힘겨루기하는 동안 방패가 덜덜 떨려 온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힘이 부족해서가 아님을 알았다. 싸우고 싶지 않다는 눈을 내내 하고 있지 않았나. 망설이고 있는 거다. 바보 같이 나약한 마음이었다. 예전의 나보다도 더 우유부단하다. 그 사실이 탐탁치 않았던 나는 방패 너머로 말을 걸었다. 

 

"영웅이 되려면, 날 쓰러뜨려야 한다. 어줍잖은 마음으로 상대하다가는 너도, 네게 소중한 자들도 무너질 테지. 그런 모습이 보고 싶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패로 가려져서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마 참담한 얼굴일까. 뭐든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말을 건 것은 단순 독백에 가까웠다. 이후 접점은 결투만으로 충분했다. 떨리던 방패가 검을 튕기며 바짝 뒤로 이동했다. 진정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 . .

 

​챙!

 

     맑은 소리와 함께 방패가 튕겨져 나갔다. 기나긴 싸움의 끝이 다가왔다. 실력이 생각보다 좋아 애를 먹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단련한 자의 몸놀림이었다. 비록 실전 경험은 부족해 승기를 잡지 못했지만 말이다. 마검이 불길하게 웅웅거렸다. 마치 이제 곧 누군가의 죽음이 다가올 걸 아는 것마냥. 고개를 내리니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기어코 방패를 다시 든 네가 보인다. 패배를 직감했을 텐데도, 미련하게 포기하지 않았다. 정녕 너는 영웅이 되고 싶은가. 살아있는 희망은 언제든지 살아있는 재앙이 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검을 치켜올렸다. 상대가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 같지만, 이 일격을 막아낼 수는 없을 거다. 온 힘을 실어 내리치려던 그때, 쾅! 하고 천둥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무슨...!"

 

     천둥의 색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로 벼락을 치게 한 적이 없었다. 그 말인 즉슨 마검이 혼자서 한 일이라는 얘기다. 폭주의 징조였다. 나는 재빨리 마검을 휘둘렀으나, 이변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상대는 도망가 있었다. 그 뒤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주도권을 쥐려 발악하는 몸부림이었다. 몸을 내놓으라는 환청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마음이 약해진 이 순간에 제격이라고 느꼈나. 나는 검을 쥔 주먹을 꽉 주며 마검을 잠재우려 애썼다.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옆에서 경악으로 물든 시선이 느껴졌다. 젠장, 이런 상태에서는 완전히 무방비했다. 기습 당해도 그대로 받아 버린다. 이대로 너의 손에 무찔러지는 건가. 그런 결말인 건가. 어째서인지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다. 죽고 싶다 생각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걸까. 나약한 생각을 하자 그곳으로 마검의 압박이 들어 왔다. 제 마음대로 안 되는 신체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터벅터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유맛 쿠키. 너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건가. 나를 꺾고 네 의지로 나아가서 어떤 결말에 도달하는 건가. 심장이 빠르게 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 버릴 것만 같다. 설렘인가, 희망인가, 절망인가, 결함인가. 전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이 날 뒤로 하고 네가 나아가게 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결말이겠지. 아니면 형벌이나. 그렇지만 역시 여기서 끝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숙인 어깨에서 따뜻하고 푹신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나의 등까지 감싸버렸다. 그리고 깨끗하고 따뜻한 기운을 내 몸에 퍼뜨렸다. 조금씩, 천천히 마검의 기운이 물러간다. 두통이 가시기 시작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믿겨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설마, 눈을 굴려 자신을 감싸 안은 형체를 본다. 하얗고 커다랗다. 그러니까 네가 맞았다. 왜 날 안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경직된 몸이 도저히 널 밀어내지 못했다. 무슨 생각인 건지, 이래도 되는 건지 많은 생각이 머리를 오고 떠났다. 그대로 껴안겨서 견딘지 몇 분째, 마검의 기운은 전부 사라졌는데도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안겨 있을 무렵, 갑자기 얼굴로 축축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제서야 흘긋 네 얼굴을 쳐다봤다. 어느새 먹구름이 물러나서 타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네가 서있었다. 역광이 진 얼굴은 눈을 꼭 감고, 참을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듯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후두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이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눈물이란 말인가. 나에 대한 동정인가? 멍하니 바라보자 네가 더 굵은 눈물을 흘리며 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신조차 구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영웅이 되나요..."

 

     순간 숨을 멈췄다. 반박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린 아이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보지도, 짐작하지도 못한 나의 일면이 까발려진 것만 같았다. 너무 충격적이라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풀썩, 그 사이에 힘이 다한 것인지 네가 쓰러졌다. 난 멍청이처럼, 이후에도 얼마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이질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태양은 눈물을 흘린다고. 그리고 그건 꽤 따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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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윅스는 이스라엘 회사입니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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