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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눙 님 ◆

    *글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참고해주세요.
    *종교 관련된 묘사가 나오지만, 특정 종교를 묘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현실 종교 / 게임 내 종교 모두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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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야. 요즘 계속 네가 꿈에 나온다. 나는 이게 죄악 같다. 신도를 마음에 품은 사제 같다는 말이다. 천사에게 욕정하는 악마 같아. 제발 부탁이니, 이제 내 꿈에 나오지 마라. 너도 이젠 알고 있지 않나. 내 죄악은 묘지보다도 더 깊게 파고들어가 점점 단단해지고 뒤틀려 굳어버린다. 이만 그 하얀 손에서 나를 놔. 네가 기억하는 영웅의 마지막 부탁이다.

 

  다크초코는 눈을 떴다. 그 고백마저도 제 꿈인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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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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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초코는 제가 천국의 존재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적과도 같은 낙뢰가 칼끝에서 나아가 적을 불태웠다. 비록 나는 살생을 저지를지라도 선한 이들을 지켜내고 악을 거두어내었으니 제가 죽을 적에 그 ‘신’께서 저를 보살피시라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인 다크카카오도 또한 그렇게 믿었다. 다크카카오 왕국의 국왕이자 제사장인 그는 의식을 할 때에 다크초코와 동행했다. 그가 비록 국왕의 아들이고, 국경을 지키고 백성들을 지킨다 한들 그 손에 여전히 케이크 괴물의 피가 진득하게 묻어있는데 어찌 그를 신성한 제사에 참여시키냐 하는 반발이 없지 않았으나 다크카카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으니 이 나라의 왕자로서, 나의 보조로서 자격이 충분하다. 다크초코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깨를 넓게 폈다. 그래. 비록 내가 떨어져 지옥에 가더라도 지옥의 존재들과는 다른 자임을 신께서 알고 계시겠지. 다크카카오는 그의 회개를 들어주고 죄 사함을 몇 번이고 내려주었다. 다정한 말을 해주는 아비는 아니었다만 그를 위해 빌어주는 것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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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도 다크초코가 행한 희생의 영광을 누린 쿠키였다. 천하를 호령하는 검술 사이 무너져내린 창조주의 피조물이 타닥타닥 타들어 갈 적에 우유 마을 쿠키들은 그 긴 생머리의 쿠키마저 두려워 둥실둥실 솜사탕처럼 모여 서로를 끌어안았다. 겁이 많다고 감사하는 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마을의 이장이 조심스레 걸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다크초코는 싱긋 웃었다. 겁먹지 말라는 듯이. 나는 다크카카오 왕국의 왕자, 다크초코입니다. 살생의 죄는 제가 대신할 터이니 걱정마시고 평안함을 즐기십시오. 우유는 어머니의 치맛자락 뒤에서 조심조심 걸어나왔다. 다크초코의 허리춤쯤에 겨우 키가 닿을 정도로 아주 작은 쿠키였지만 제게 다가온 쿠키는 이장 이외엔 우유 하나였으니 다크초코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무서운 검을 등 뒤로 숨기고 다크초코는 한쪽 무릎을 꿇어 우유와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그 다정한 눈매를 우유만 알았다. 왕자님! 제가 왕자님을 위해 기도하게 해주세요. 다크초코는 흔쾌히,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앞니가 두 개 빠진 쿠키 앞에 두 무릎을 다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에 우유 마을의 모든 쿠키들도 두 손을 모아 맞잡고 왕자를 위해 빌었다. 우유의 서툰 발음이 제법 또랑또랑 마을에 울렸다. 우리를 구해주신 왕자님의 손에 묻은 피를 씻어주시고, 이 많은 생명을 구했음을 왕자님이 당신께 가실 적에 알아주십시오. 어린아이임에도 기도를 곧잘 해낸다. 다크초코는 그가 대견해 품속에 숨겨두었던 다크초콜릿을 꺼내주었다. 쌉싸름하지만 좋은 버터를 사용해 윤기가 나고 풍미가 좋은, 아주 고급 초콜릿이었다. 너무 쓰면 부모님께 말씀드려 간식에 넣어 먹으렴. 다크초코는 살생을 저지를 적에 꼈던 장갑을 벗고 우유의 자그만 머리통을 잡고 그 이마에 쪽 입맞췄다.

 

  이제 어금니까지 전부 새로 나고 키가 왕자님만큼 커진 우유는 아직도 그날의 입맞춤을 기억했다. 제 머리 위로 쏟아지던 그분의 아름다운 머릿결과, 그 머릿결이 뿜어내던 쌉싸름한, 어른스러운 초콜릿 향기.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이 아름다워 다크초콜릿을 먹어보려 애썼지만 너무 써서 먹지 못했다. 왕자님께서 그렇게나 선한 분이시라면 이마저도 시험일 거예요. 그래도 먹을 수 없는 건 여전했다.

  달콤한 밀키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초콜릿을 한 조각 톡 떨구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조각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를 향한 동경이 퍼지듯 짙은 갈색의 달콤쌉쌀함이 퍼져 우유에 녹아들었다. 그건 정말이지 입맛에 딱 맞았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그 핫초코를 먹은 이후로 우유는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다크초콜릿과 밀키우유로 핫초코를 만들어 먹었다. 제게 자리 잡은 작은 의식이었다. 이것도 우상숭배로 여겨져 벌을 받을까 두려워질 정도로 우유는 왕자님을 동경했다. 당신과 같은 어른이 되겠어요. 우유는 우유 마을에서 가장 몸이 단련된 쿠키로 자라났다. 우유 우물을 지키는 가디언으로, 성기사로 인정받았다. 당신에게 가까워졌을까요. 다크초코가 제게서 아득바득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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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카카오 왕국이 멸망할 거란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이 되었다. 다크초코는 아버지의, 저희의 왕국을 되살리기 위해 온 대륙을 뛰어다니며 방법을 갈구했으나 찾아낸 것이라곤 사탄이었고 그는 집요하게 다크초코에게 달라붙었다. 너는 이미 죄를 많이 지은 몸이 아니더냐. 네가 마지막으로 다시 희생해라. 그렇다면 다크카카오 왕국이 재부흥할것이니라. 다크초코는 그가 내미는 검을 받아들였다. 윽, 하아... 왼손을 타고 올라오는 천둥번개의 번쩍거림이 온몸을 전율에 빠뜨렸다. 아버지,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제가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돌아봐주실 겁니다, 지옥에 가는 건 저만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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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희생으로 하여 다크카카오 왕국은 정말 재건되었다. 다크초코는 변절자로 내몰렸고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다크카카오마저도 제 아들을 더 이상 감쌀 수가 없었다. 아들아. 네 손에 들린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그 검을 들고 성전에 들어온 탓에 신이 노하여 보랏빛 천둥이 번쩍번쩍 다크카카오 왕국에 내던져졌다. 아버지! 제가 이것을 드릴 테니 우리 창조주의 화를 잠재워주소서. 다크초코는 제 왼 눈을 바쳤다.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못해 그 강인한 다크카카오가 피를 흘리며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실신할 정도였다. 신의 화는 멈추었으나 국왕은 시름시름 앓았다. 그 눈을 썩지 않게 보관하라. 내 아들이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하였으니 나는 신께서 재차 노하시더라도 그를 기릴 것이다. 변절자 다크초코의 제물을 귀하게 여기기 싫은 마음에 신하들은 그 명령을 거역하였다. 그리고 다크카카오는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아들의 흔적을 취했다. 신께서 노하십니다! 다크카카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벌은 내가 모두 받겠다. 내 아들을 더 이상 모욕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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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나쁜 소문은 우유 마을에까진 닿지 못했다. 아이들은 종종 왕자님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렀고 그가 천사와 만나 다크카카오 왕국을 되살린 줄만 알았다. 우유도 그래서, 장성한 몸을 왕자님께 보여주고 싶었다. 존경하는 왕자님! 당신이 구했던 어린아이가 이렇게나 컸습니다. 부디 당신을 자랑스러워하시고 나를 대견히 여겨주소서. 우유 마을 쿠키들의 격려와 응원과, 왕자님께 전해드릴 선물을 한가득 들고 우유는 왕성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저지당했다. 이 왕국에는 왕자가 없다. 문지기의 말에 우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크초코 님 말이에요! 그러자 입을 틀어막혔다. 변절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벌을 받는다! 그는 더 이상 이 왕국의 왕자가 아니야! 우유는 눈을 여전히 둥그렇게 뜬 채였다. 저는 우유 마을의 대표이니 폐하를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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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카카오는 흔쾌히 어린 백성을 들였다. 챙겨온 이런저런,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물건들은 폐하께 전달하기 전에 검사해야 했기 때문에 압수는 당했다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서 그의 아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크카카오가 선수를 쳤다.


내 아들에 대해 안다고 들었다.


  부자연스레 침을 삼킨다. 우유는 머리를 조아렸다. 어릴 적에 저희 마을이 왕자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대표로 감사 기도를 드렸는데, 이제 그분에 비할 만큼 자란 것 같아 한번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다크카카오는 외로운 왕좌에 앉아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어린 쿠키를 내려다보았다. 아, 나의 어린 아들도 그렇게 빛나는 갑옷을 입고 온 대륙을 쏘다녔지. 내가 무지한 탓에 그가... 그는 그러나 그 깊은 회한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모순이다. 그의 희생으로 재건된 왕국의 금기어가 그의 이름이라니. 다크카카오는 그래서 하얀 어린 쿠키의 어깨에 제 까만 망토를 둘러주었다. ...왼 눈이 없는 검사를 찾거라. ......... 찾는다면. 내 안부도 전해주거라. 우유는 두 가지 임무를 등에 메고 그렇게 모험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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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요즘 반짝반짝 빛나는 신성해보이는 쿠키가 까만 외눈을 찾는다던데. 외눈, 넌 어떻게 생각해? 이름을 숨긴 단발의 검사에게 투기장의 쿠키가 물었다. 검사는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라고 전해. 정화 따위를 받고 싶어 떠도는 게 아니라고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어나간다. 검은 망토를 걸친 우유가 따라 일어났다.

 

  우유는 그를 뭐라고 부를지 알지 못했다. 다크초코라는 왕족의 이름도, 왕자라는 이름도, 나의 그분은 숨기고만 싶으실 텐데. 언젠가부터 ‘나의’ 왕자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 한 적이 없으니 아무도 면박 주지 않았다. 그러니 고쳐질 리가 만무했다. 알 수 없는 소유욕이 살살 끓어올라, 아무도 없이 둘만 남을 때까지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종종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만 우유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집요하게 뒤쫓았다.

  결국 등 뒤에 그가 나타났다. 외눈의 검사, 다크초코 쿠키... 용건부터 말해. 우유는 등 뒤로 그가 저주받은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휙, 뒤돌았다. 찔려도 상관없다는 듯. 움찔 떨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어렴풋이 보았기 때문이다. 성기사 후보생으로 인정받아 그런지 저, 미래도 조금씩 보이네요. 눈을 또랑또랑 뜨고 부모님께 말했던 청소년 시절이 떠올랐다. 정말 미래가 보이네. 아주 조금이지만. 우유는 무사히 다크초코와 눈을 마주쳤다. 다크초코님! 대뜸 이름을 부르자 검을 고쳐잡는다. 네 이름은 뭐지. 우유는 살짝 미소지었다. 우유맛, 쿠키입니다.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우유, 라는 말이 참 익숙해서 다크초코는 칼을 천천히 내렸다.


“...우유 마을의?”
“예, 다크초코 님.”
“이름은 부르지 마라.”
“예, 왕자님.”
“......그냥 외눈이라고 불러라.”
“전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이상한 고집을 가졌군.”
“참, 전해드릴 게 많아요, 지내시는 곳이 어디이신가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거든요. 저 이상한 쿠키 아니니까 초대해주시면 안될까요?”


  다크초코는 태어나 처음 본 당돌함에 그대로 휘말렸다. 나를 본 적이 있나? 묻자 어렸을 적에 보고 처음이지만 매일 다크초코님을 떠올리며 살았어요. 기억과 다른 모습이시긴 하지만 여전하시네요, 목소리는 더 멋있어지셨구요. 그래서 그냥 그를 데리고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와버렸다. 사실 그 당돌함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망토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우유 마을의 쿠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어쩌면 나를 정화해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아니, 다 아니다. 그냥, 그 당돌함 때문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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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거처는 우유의 생각보다 훨씬 비좁고 거칠고 남루했다. 왕자님께서 이런 곳에서 살고 계시다니, 다크카카오 왕국에 속한 마을 쿠키로서 무척이나 괴롭네요. 다크초코는 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위해 따뜻하게 우유를 한 잔 데워주었다. 방랑자인 그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아, 댁 안에서는 왕자님이라 불러도 괜찮을까요? 죄송해요, 너무 오랫동안 왕자님이라고 알아왔거든요. 다크초코는 저를 위한 술을 준비했다. 아니, 외눈이라고 불러. 우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쿠키 이름이 외눈이 뭐예요. 그게 참, 어린 애의 투정이라 다크초코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는가도 몰랐다. ...그래. 그냥 다크초코라고 불러라.

 

  적막은 길지 않았다. 우유는 오랜만에 만난 제 영웅에게 말해줄 것이 많았다. 그 전에 주섬주섬 준비해온 것들을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식들은 다크카카오에게 바친 것이 절반이고 그를 찾아 떠돌던 중 상하기 직전에 제가 다 먹어버린 것이 절반이라 남은 것이 없었다. 망토 안 커다란 가방에서 편지 뭉치를 꺼냈고 마을 사람들이 챙겨준 작은 부적 따위를 꺼내 늘어놓았다.


“...이건.”
“저희 마을 사람들이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구 쓴 것들입니다. 그 이후로 크림 늑대들이 단 한 번도 다시 내려오지 않았어요. 왕자님의 기도 덕이라고 저흰 믿고 있구요. 이건 부적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만드신 건데요, 제가 성기사가 되려고 공부하고 훈련할 때 같은 걸 항상 지니고 다녔어요. 효과가 있어요.”
“.........괴롭겠구나, 너도.”
“아뇨, 전 괴롭지 않습니다. 폐하께 이야기는 들었어요. 폐하께선 왕자님을 자랑스러워 하시던데요. 아무 곳에도 말 할 수가 없어 답답하셨다고도 하셨구요.”
“거짓말을 잘도 하는구나.”
“들켰네요. 직접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그 마음은 느낄 수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이거나 마저 마셔. 그리고 돌아가라.”


  손도 안 댄 우유를 쭈욱 밀어주자 아, 하더니 가방 한구석에서 다크초콜릿을 꺼낸다. 구겨진 포장 안에서 모나게 자른 한 조각을 우유 잔 위로 톡 떨군다. 실례가 안 된다면 티스푼이나 머들러를 빌릴 수 있을까요? 다크초코는 그런 식의 고상한 물건을 집에 둘 처지가 아니라 커다란 숟가락이라도 꺼내주었다. 우유는 마음에 들어했다. 휘휘 젓자 흰 우유가 옅은 갈색빛으로 서서히 변했다. 그때 왕자님께서 저한테 초콜릿을 주셨거든요. 그땐 왕자님이셨으니까 그냥 이렇게 부르게 해주세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썼는데, 이렇게 해서 먹었더니 맛있더라구요. 그 이후로 항상 이렇게 먹어요. 정말 맛있어요. 다크초코는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다 잔에 담긴 술을 휙, 버리고 대신에 물을 받았다. 취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우유는 모른 척 핫초코를 마셨다. 드셔보실래요? 다크초코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기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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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잘재잘 말이 많은 쿠키는 간만이었다. 제가 왕국에서 쫓겨난 뒤로 잠깐의 수다 떨 여유도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잔에 은은히 남은 알콜 향 때문에 입맛을 다셨으나 꿋꿋이 맹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린애가 풍기는 달콤한 반죽 냄새 때문에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그는 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또 왕국에서는 어떤 일을 겪었는지 같은 걸 말해주었다. 그게 다크초코에게 달가운 내용은 아니었으나 듣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라 그의 눈은 피하더라도 말은 들었다. 폐하께서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왕자님이 그리우신가 봐요. 다크초코는 고개를 저었다.


“감히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 마라.”
“뭐가 문제인가요?”
“...나는 변절자고, 동시에, 사탄과 손을 잡은 타락한 몸이다. 국왕께서 나를 그리워하심은 이 더러운 힘을 그리워하신다는 말과 같으니 곧 왕께 모욕이다. ... 왕께서-,”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시면 안 되나요?”
“.........”
“죄송해요, 그냥 들을게요.”
“......아버지, 께서. ...왕께서, 어렸던 나를 자랑스러워하셨음은 알고 있지만. ...... 이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다. 나를 신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셨음을 안다. 그런 폐하와 신의 앞에 나는 씻을 수 없이 더러운 짓을 저질렀어. ... 다만 왕국이, 잘,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그렇다고 네가 돌아가 전해드려라.”
“전 돌아가지 않을 작정으로 왔어요.”
“뭐?”
“함께 있어요, 전 여기가 마음에 드네요.”
“......그래. 네가 기억났어. 그, 앞니가 없던 아이지.”
“와아, 기억해주시다니 기뻐요! 지금은 단단하게 잘 자랐답니다.”
“-그 때 그렇게 어렸으니 지금도 철이 없는 게 당연하지. 돌아가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 잘 생각해.”


  다크초코는 단번에 검을 꺼내들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천사처럼 더 반짝반짝 빛나는 우유에게 그 검을 겨누었으나, 저를 똑바로 마주치는 그 눈을 본 순간 깨달았다. 저는 결코 그를 벨 수 없었다. 입으로는 나는 더 이상 살생이 두렵지 않다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으나 우유가 짐을 마저 푸는 꼴을 그대로 내버려두고야 말았다. 저는 바닥에서 잘게요. 침낭이 있으니 제 걱정은 마세요! 팽팽하게 긴장한 채로 십수 년을 살았다. 그렇지만 그가 핫초코를 마시는 모습에까지 신경을 곧추세울 순 없게 되었다. 칼을 거뒀다. 속에서 들끓는 검의 유혹이, 저 녀석을 베어버리자는 속삭임이, 여느 때처럼 견디기 힘들지 않았다. 난, 안 해. 단호한 거절에 사탄이 노해 왼눈이 빠질 듯-이미 없지만- 아프기 시작했다만 견디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꾹 입술을 말아물었다. 우유도 그 어두운 기운을 느낀 눈치였다. 사탄! 그가 대뜸 외치며 다크초코를 돌아보았다. 다크초코는 피식 웃었다. 왕국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런 존재이긴 하지. 우유는 마시던 것을 내려놓고 뚜벅뚜벅 다크초코에게로 걸어왔다. 너무 앳된 얼굴이라 잊고 있었는데, 그 몸은 저에게 대항할 만큼 장성한 몸이었다. 금세 눈앞까지 다가온 그였다.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왼눈이 점점 더 아파왔다. 작은 악마가 그 안에서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우유는 그의 이마를 쓸어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윽, 어윽... 선과 악이 몸 안팤으로 격렬하게 싸워대기 시작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픈 신음을 흘려내자 그가 조금만 참으세요, 하고 속삭인다. 필요 없어!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소리쳐봤지만 겨우 말뿐이었다. 겨우 똑바로 뜬 외눈뿐이었다. 그 정화를 오랜 시간 기다려왔다. 누군가가 제게 이제 너에게는 죄가 없노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몸이 벌벌 떨렸다, 꺼진 왼쪽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우유는 사제가 아니었다. 기껏해봐야 보조사제 정도로 사제의 곁에서 의식을 돕는 정도만 배웠다. 그렇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우람한 몸을 가녀리게 떨고 있는 다크초코의 입술 안으로 신성한 카카오닙스 조각을 밀어넣고 입술을 닫았다. 익숙한 쓴맛에 다크초코는 눈을 감았다. 그 위로 하얀 어린애가 뭐라뭐라 정성 들여 기도하고 제 죄를 사하여달라 기도하는데, 들끓는 사탄의 발작이나 신체의 불편함은 옅어지고 그 쓴맛만 극대화되었다. 몸 위로 그가 성수를 떨어뜨리고 머리를 붙잡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다. 간만에 느껴보는 개운함이었다. 입안에 남은 카카오닙스를 꿀꺽 삼켰다. 그게, 목구멍을 따라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웠던 다급한 순간이 지나가고 어두운 단칸방 안에 정적이 찾아든다. 다크초코는 제가 마시던 컵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생각해보니 우습다.


“...구마를 하는데, 키스는, 필요 없지 않나.”
“세상이 바뀌어서요.”
“농담도 할 줄 아는군.”
“그렇지만 꼭 하고 싶었어요.”
“......키스를?”
“그 때 왕자님도 제게 키스해주셨거든요. 그 날이 가끔 꿈에 나와요.”
“왜, 몽정이라도 하나.”
“해도 되나요?”
“..........”
“그렇게 진한 카카오 향은 처음이었거든요. 머리카락에서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나서 신기했어요. 우린 우유 냄새 밖에 안 나는데.”
“.........”
“약속 하나 해주시겠어요?”
“무슨?”
“아주 나중에라도 그 악마들의 손에서 벗어나시게 된다면.”
“.........”
“다시 머리를 길러주세요.”
“......왜?”
“.........그리워서요.”

 

 

 

-

 

 

 

  일주일 쯤 함께 지냈나. 여기도 나쁘지 않은데 계속 살아도 되겠다던 우유를 설득하고 꾀어 돌려보낸 게 벌써 3주나 되었다. 밤마다 숨이 막혀 눈을 떠보면 괴로운 얼굴의 우유가 제 목을 조르고 있었다. 환영도 지긋지긋하다. 믿을만한 환영을 보여줘야 괴롭던가 하지. 생각하자마자 아버지의 환영이 저를 짓누른다. 이것도 역시 믿을만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기꺼이 괴로워했다. 악마는 역시 악마로구나. 진이 빠져 잠에서 깨어나, 다크초코는 술을 마시려다 우유를 데웠다. 틱틱틱틱... 레버를 돌리면 불꽃이 켜지고 그 위에 냄비를 얹고 신선하지 않아 저렴한 우유를 따르고. 이 집에서 하얀 것은 몇 되지 않았다. 다크초코의 머리 브릿지, 눈썹과 속눈썹 아이싱, 우유... 다크초코는 가스레인지 불로 담배를 불붙였다.

  다크초콜릿을 넣어봤다. 녹는다. 녹는구나. 그가 일부러 제게 그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유, 에 녹는, 다크초콜릿. 숟가락으로 휘휘 젓자 한결 색이 부드럽게 퍼진다. 악몽을 꾸거나 가위에 눌리면, 다크초코는 술을 마시고 초콜릿을 먹었다. 싸늘해진 몸을 덥히고 씁쓸한 입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초콜릿이 다 녹아 더 이상 색이 짙어지지 않는 핫초코를 내려다보다 벌컥벌컥 마셔보았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따듯함과 달콤함. 그게 울렁울렁 목으로 내려가 배까지 따듯하게 덥히는 게 느껴졌다. 아. 앞으로도 악몽을 꾸면 이걸 해 먹어야지. 담배는 누가 빨아주지도 않았는데 혼자 타들어갔다. 그의 악랄한 검은 그 자리에 가만 눕듯이 놓인 채 생각했다. 저걸 어떻게 뒤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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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는 다크카카오 왕국에 돌아왔다. 외눈의 검사를 만나고 왔습니다. 다크카카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라. 왕국의 선물을 조금 챙겨줄 테니... 우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시 만나러 갈 예정입니다. 그에 도움이 되는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다크카카오는 정말이지 기가 찼다. 저 나잇대 쿠키는 다 저렇게 맹랑한가. 그렇지만, 그 나이였던 아들을 자꾸만 떠오르게 하는 그라 외면할 수가 없었다. 튼튼하고 따뜻한 옷을 주었고, 견고하게 만든 우유 지팡이를 주었고, 깨지지 않을 방패를 쥐여주었다. 그 검사를 위한 선물은 없습니까? 그래서 안주머니 깊이 금화를 한가득 넣어주었다. 만일 가로챈다면 내가 기꺼이 살생을 저지르마. 우유는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신이 노하실 일은 제가 마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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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초코는 우유의 꿈을 꾸었다. 저는 왕자였고 그는 기사였다. 함께 수련했고 땀을 흘리고 웃었고 격려했고 이마에 키스했다. 헉! 다크초코는 그래서 그게 악몽인 줄 몰랐다. 좋은 꿈이었다, 기쁜 꿈이었다. 돌아갈 수 없어 괴로운 마음은 짙어졌지만 다시 그 꿈을 꾸고 싶어 베개 아래에 머리를 처박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꿈이었다. 그를 돌려보낸 제자신이 미웠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가 있을 자리는 제 곁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우유의 환영을 밀어내지 못했다. 악랄한 검이 자신을 더 나락으로 떨구려는 줄도 모르고.

  다크초코님, 사랑해요. 저를 데리러 와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손길이 다크초코의 입술을 쓸고 이마에 입맞춘다. 말랑하고 촉촉한 어린애가 와닿아 정신이 아찔하다. 다크초코는 왕국에서 쫓겨난 이후로 신에게 잘 기도하지 않았으나 그런 환영을 본 날 아침에는 돈을 벌러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아쥐고 그 위에 이마를 박고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웠다. 당신의 아이를 감히 사랑하는 나를 벌하시고,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기억하시어 괴로운 환영을 보여주는 악마를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 제,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씨발, 제가 죄 없는 생명을 구할 적에는 그렇게나 잘 들어주셨으면서 이제는 저를 버리셨나이까. 창조주시여. 당신이 선택한 그 하얀 아이를 제게서 떨쳐내주십시오. 원하지 않습니다, 감히 바란 적도 없습니다. 그 아이의 정화 없이도 나는 살 수 있으니 그 아이가 그의 삶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 신이시여, 제가 마지막으로 비옵니다. 정말 저를 내버리실 작정이십니까. 온 세상의 악마를 제 몸속에 집어넣어도 좋으니 이 머릿속에서 그 아이 하나만 빼주십시오...

  기도를 하다가 아무래도 신이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 아무 답이 없으면 아버지에게라도 빌었다. 그리곤 마을 사람들에게 빌었고 우유에게도 빌었다. 그러다가도 식탁 위에 한가득 놓인 편지 봉투와 귀여운 부적 따위를 보면 저를 꾀어낸 사탄이 증오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너만 아니었다면 난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다. 더러운 악마 새끼! 멀뚱히 놓인 검을 향해 소리 지른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목구멍에서 피 냄새가 울컥 올라올 때까지 다크초코는 뭐라도 화풀이를 했다. 그러다 또 제 처지를 깨닫고 밖으로 나가 다른 쿠키들과 전투하고 이기고 외눈이라 불리고. 볼 때마다 괴로웠지만 그래도 편지와 부적은 태우지 않았다. 그게 꼭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처럼 보였다. 정말 신을 사랑하는, 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만든 신의 표식... 이거라도 지녀야 신께서 나를 가엾게 여기실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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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가 찾아왔다. 다크초코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저번에 식사를 대접받기만 하고 대가를 드리진 못해서 이것저것 챙겨왔어요. 참, 저도 옷을 하나 새로 장만했답니다. 이곳은 다크카카오 왕국보다 조금 더워서 말이죠! 눅눅해지지 않으려면 환기가 잘 되는 옷이 좋겠더라구요. 그리고 이건 다크초코님을 위한 거예요. 이게 뭐냐면 -.

우유야.
네!
돌아가라.
네?
부탁이다. 그냥, 내게 준 셈 치고 네가 다 가지고 돌아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여기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구요. 반갑게 맞아주세요.
조금도 반갑지 않아. 난 널 반길 생각도 없고, 넌 나 따위를 신경쓸 만큼 미천한 존재가 아니다. 우유 우물을 지키는 성기사가 되었다고 했지 않나. 그렇다면 당연히 마을에 있어야 하는데 왜 왕국을 위한다는 핑계로 어둠의 힘을 잡은 나를 쫓아다니는 건가! 넌 날 정화할 수 없어. 그러니 이제는 정말 돌아가. 어서!!


  이 정도 말했으니 알아들었겠지. 그새 차오른 숨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 커다란 쿠키가 흔적도 없다. 어? 눈을 끔뻑거렸다. 한 번, 두 번. 다시 눈을 뜬 순간 보이는 건 어두운 단칸방의 무너질 듯한 천장. 아, 꿈이다. 지긋지긋한 꿈. 또 어린애의 꿈을 꾸고, 꿈에서조차 상처 주려 아득바득...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이런 못난 저를 당신의 신하들 앞에 감싸주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래요, 저의 몰락이 아마 많은 사람을 편하게 했겠지요... 몸에 열이 올라 다시 잠이 들었다. 식은땀을 닦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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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가 찾아왔다. 다크초코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저번에 식사를 대접받기만 하고 대가를 드리진 못해서 이것저것 챙겨왔어요. 참, 저도 옷을 하나 새로 장만했답니다. 이곳은 다크카카오 왕국보다 조금 더워서 말이죠! 눅눅해지지 않으려면 환기가 잘 되는 옷이 좋겠더라구요. 그리고 이건 다크초코님을 위한 거예요. 이게 뭐냐면 -.

  이게 뭐지? 다크초코는 눈을 끔뻑였다.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몽사몽 간에 본 것이 꿈에서와 같은 그 모습이다. 또 꿈이군. 또, 또 환영이야. 다크초코는 그 환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재잘재잘 여전히 말이 많다. 내가 얼마나 그를 생각했으면 같은 환영이 두 번씩이나 기어나오는지. 심지어 말투도 제법 비슷하군. 그래, 정말 그를 많이 생각했어. 사실이야. 그 개운한 기분이 잊히지 않아. 맘 놓고 사랑하고 싶어. 그가 내 이마에 키스했으면 좋겠어. 그의 어릴 적 내가 그를 구했든 그가 나를... 그래서 다크초코는 몸을 일으켜 침대-라기엔 무척이나 남루한 솜 덩어리 정도였지만-에 몸을 쪼그리고 앉아 그 환영이 이것저것 늘어놓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냥 한 번 웃어봤다.

  환영이 멈췄다. 눈을 끔뻑거린다. 왜 멈추지? 싶어 고개를 들고 가만히 바라보자 다시 움직인다. 아, 움직이네. 하고 다시 팔뚝에 뺨을 기대었다. 환영이 멋쩍다는 듯 웃었다. 다크초코님, 웃으시는 건 처음 봐요. 다크초코는 으음, 하고 작게 긍정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겠지. 말을 뱉어놓고 가만히 생각해봤다. 왜 웃는가? 그거야 혼자 있으니까, 웃어도 부끄럽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저 아이에게 본능대로 행동해도 되는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환영은 여전히 물건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건 다크초코님께서 왕국에서 쓰시던 연고라고 하시더라구요. 아마 엄청 좋은 거겠죠? 어? 다크초코-님...

  다크초코는 그냥 그에게 푹 안겼다. 아, 몸이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머리가 갠다. 더러운 악마들이 날뛸 틈도 없이 촘촘히도 순결하다. 넓은 가슴팍과 어깨에 비해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고 다크초코는 그에게 완전히 기댔다. 환영이 입술을 꾹 물었다. 다크초코님... 그러더니 환영의 손길이 다크초코에게 와닿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여주고. 아, 행복하고 부끄러운 꿈이구나. 태어나 어리광을 부려본 적은 없으나 어떻게 하는 지는 알았다. 가슴팍에 뺨을 대고 부볐다, 단단한 몸이 제법 안정감이 있어 좋았다. 한참이고 이렇게 지내고 싶었다. 이 꿈에서 깰까 얼핏 두려웠다. 부끄러운 감정이 벌써부터 몰려오기에 다크초코는 제가 꼭 하고 싶었던 것 한 가지만 하기로 했다.

  우유야. 이름을 부르자 네, 넷. 하고 잔뜩 굳어버린다. 그 뺨을 끌어와 새하얀 어린애의 코끝에 입 맞췄다. 그가 순순히 손길에 따라주기에 턱을 들어 이마에도 쪽 입 맞췄다. 고작 이런 걸로 몽정이니 뭐니 하다니. 내가 이런 어린애를... 그러면서도 꾸욱 끌어안았다. 잠에 취한 채라 다 몽롱했다. 눈도 잘 안 떠졌고 생각도 흐릿했다. 머리를 쓸어넘기고 그를 올려다봤다. 내 환영이지만 원하는 대로 따라주진 않는군. 이마를 톡톡 쳤다. 그제서야 다가와 키스한다. 대뜸 입술에 해버린다. 그 뺨을 잡아 혀를 섞자 머뭇거리다 그에 응한다. 그러다 단번에 밀쳤다. 하... 한심하군. 그대로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환영만 거기 서서 눈을 끔뻑거리고 입술을 문질렀다.

 

-

 

  잠에서 깨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오늘 무언가 일거리가 있었던가. 또 그런 꿈을 꿔서 영 몸이 뻐근하군. 침대 위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휙, 거실을 돌아봤다가 다크초코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우유가 거기 앉아있었다. 뺨을 붉히고 제 눈치를 보면서. ...일어나셨사와요. 요상한 말투를 쓰는 걸 보니 환영은 아니다. 일어나 옆으로 오더니 옆에 앉아버린다.


“다크초코님이 절 원하시는 줄 몰랐어요.”
“뭐?”
“저와 키스하고 싶으셨던 거죠? 그걸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왔을 텐데. 밤중에 들이닥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아침 일찍 왔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입을 맞추시고 또 잠들어버리시다니. 저 여기서 꽤 오래 기다렸다구요.”
“......뭐?”
“꿈꾸는 듯한 그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다크초코님.”
“이봐, 무슨 소리를...”
“또 키스해주시면 안 될까요?”


  일단 그의 입부터 틀어막았다. 그리고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굴려도 사실 답은 한 가지뿐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게... 환영이 아니었군. 방법은 두 가지였다. 인정하고 그에게 몇 번이고 정화를 받고 회개해 깨끗한 몸이 되거나, 당장 여기서 꺼지라고, 정말 꿈이었던 그때처럼 모질게 굴거나. 새하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동시에 머릿속에서 악마들이 날뛰었다. 그를 착각하게 만들어 괴롭게 하려고 했으나 우유가 돌아오는 건 계획에 없었다. 고통스러워 입 밖으로 윽, 윽, 하는 아픈 소리가 새어나갔다. 우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버러지들이 말썽을 피우는군요. 그가 손을 잡았다. 몸이 뻣뻣이 굳었고 다크초코는 윽, 윽 하는 소리만 낼 수 있었다. 우유는 다 꺼내지 않은 의식의 물건들을 꺼냈다. 다크초코님, 사랑해요. 당신은요, 아프지 않을 자격이 있어요. 전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는 기꺼이 손을 가져와 눈을 감게 만든다. 입속으로 다시 쓴맛이 들어온다.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그래요, 다크초코님. 얼른 뭐라도 해볼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입 밖으로 새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가! 우유는 멈추지 않았다. 다크초코는 말하고 있지 않았다. 보면 모르겠어? 네가 와서 내가 괴로워진 거잖아. 네 이기심 내세우지 말고 어서 떠나!! 다크초코는 고개를 저었다. 우유는 눈을 감은 다크초코의 입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혓바닥이 새까맣네. 상급인 게 아니라 그냥 검을 가진 놈이었구나? 다크초코의 가슴팍이 들썩들썩 요동쳤다, 숨을 헥헥 몰아쉬는데 제대로 쉬고 있는 것같지 않아보였다. 우유는 그 뺨을 잡고 이마에 쪽, 입 맞췄다. 얼른 구해드릴게요, 다크초코님.

 

 

 

-

 

 

 

  다크초코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가 악마에게서 자유로워졌나? 알 수 없다. 우유를 향한 죄책감을 거둘 수 있는가?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목덜미를 쿡쿡 찌르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다. 그 어린애가 처음으로 말을 망설인 것이 그때라서. 그립다던 그 말 때문이라서. 간만에 머리카락을 빗어봤다, 엉킨 머리를 천천히 풀었다. 그걸 손으로 한 번 쓸어봤다.

  내 기도를 신께서 들으신 걸까. 내가 그분을 사랑했던 것을 기억하셨던 걸까. 날 위해 빌어주는 이가 많았던가. 사제의 망토를 쓴 천사가 왜 내게 왔던가. 여전히 시궁창 같은 단칸방을 둘러봐도 그 이전처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가슴에 그토록 염원했던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그것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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