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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님

@sourstrawbs

Radiohead - Daydreaming 

 

 

 허먼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는 잔을 들었다. 새로 타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차갑게 식은 커피는 아니라 말한다. 깨어있는 시간을 세는 단위는 기하급수적으로 바뀐다. 허먼은 자신이 꿈꾸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발밑이 푹신하고 말랑했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시곗바늘도, 사르륵 넘어가는 종이서류도, 저를 지그시 노려보는 뉴튼도. 뉴튼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가 포물선을 그린다. 그 모습에 허먼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덩달아 같이 웃었다. 웃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허먼은 문득 아주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고이 접어 구석에 밀어 넣어두었던 빛바랜 추억. 떠올리기만 해도 햇볕에 그을린 먼지의 냄새가 나는 그런 종류였다. 허먼이 아직 한쪽 다리를 절지 않고, 뉴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게 하고 다니던 시절 말이다. 기억이란 그렇다. 당시에 좋지 않은 경험이었어도 돌이켜보고 나면 꼭 나쁘지만도 않은 때가 종종 있다. 허먼에게 있어서 뉴튼과 관련된 일은 모두 그랬다. 뉴튼 자체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눈앞에 닥칠 때는 짜증이 먼저 앞서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헛웃음이라도 나왔다.

 

 -허먼 방에 안 들어올 거야?

 -어.

 -왜? :-(​

 허먼은 뉴튼의 어리광을 무시하고 휴대폰을 끄려다 답장을 눌렀다. 굳이 성심성의껏 답변할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뉴튼이 먼저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날마다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혹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연구할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거든. 껄렁껄렁한 누구와는 다르게 나는 성실한 사람이어서 말이야.

 -그냥 머리가 느린 게 아니라?

 -전원 끈다.

 문자를 보내기가 무섭게 다급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허먼은 콧대를 짓누르는 안경을 잠깐 벗어들고 미간을 주무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의 여가 나오기도 전에 뉴튼이 하늘이 무너져라 제 이름을 부른다. 요지는 ‘당장 방에 오지 않으면 큰일이 있을 것이다. 재앙의 수준이다. 무슨 일인지 자세한 것은 알려줄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무슨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너는 방으로 돌아와야 한다.’였다. 손목시계를 살펴보니 어느덧 또다시 새로운 하루로 넘어가고 있었다. 허먼은 결국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짓고 방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뉴튼 때문은 아니었다. 연구만큼 중요한 것이 컨디션 조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아가는 발걸음이 새털만큼 가벼웠다.

 그때 들었던 폭죽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울린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 닫고 뒤돌아 뛰쳐나간 자신을 허먼은 기억한다. 그때는 그게 최선의 반응이었다. 머리에 풍성한 리본 머리띠를 하고는 카이쥬 모양의 케이크를 들고 생일축하를 외치는 뉴튼을 받아줄 여유도 노련함도 없었다.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끔찍한 기억은 다음 날 반복되었다. 케이크가 문제라 생각했는지 여전한 리본 머리띠와 함께 평범한 케이크를 들고 뉴튼은 허먼을 맞이했다. 왜 하필 리본인가 의문을 품었지만, 그 뉴튼 가이즐러에게서 괴상함에 집착하는 이유를 찾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다 싶어 허먼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케이크에 꽂힌 초를 불며 최근에 골머리 앓는 공식이 잘 풀리기를 빌었다.

 

 하하. 하하하. 기억 속에 푹 빠져있던 허먼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푹 숙인 고개를 들어 뉴튼이 허먼을 바라본다. 하하. 하하하.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는다. 서로 마주 보며 그렇게 계속 웃었다.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사랑도 연민도 아닌 진흙탕 속 우리 둘. 허먼은 뉴튼의 구원에 집착하는 이유가 뉴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뉴튼이 필요한 자신 때문인지 그 구분이 모호해짐을 느꼈다. 그가 돌아온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 않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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