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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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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튼, 그러니까 거기가 아니라니까!"

남자는 뉴튼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 글쎄, 그러니까 지금이 몇 년도인데 이런 칠판을 고집해서는 ㅡ 으악! 분필 밟았다!"

다른 남자는, 구시렁대면서 짐을 옮기다가 실수로 짐이 든 박스를 밟았다. 그의 낡은 스니커즈 아래로 부숴진 분필 가루가 날려 부산했다. 그 꼴을 본 남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뉴튼 가이즐러!"

"아, 그럴 거면 자네가 옮기던가, 허먼 가틀립!"

오늘은 허먼 가틀립과 뉴튼 가이즐러, 두 남자가 공동으로 쓰는 연구실에 대형 칠판을 설치하는 날이었다.


허먼은 조금 편집증적인 증세가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상부에 더 큰 책상, 더 큰 화이트보드, 더 많은 노트 등을 요구했다. 물론 그가 제일 원하는 것은 더 비싼 장비나 쓸만한 인력이었으나,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그는 큰 금액이 들지 않는 것들에 집착했다. 싼 재활용 갱지로 만든 노트가 몇 십 권이고 그의 책상에 쌓여 있었다. 노트에는 모델 구조와 쓰다가 고친 계산식이 가득했다. 이런 방법을 고집하지 않아도 될 법 한데, 전자 노트와 펜을 이용하기보다 허먼은 잉크 펜과 노트를 더 선호했다. 칠판은 또 어떻고. 이만한 크기의 화이트보드는 없다는 말에 그는 기어코 총무 팀에게 사정하고 사정해, 벽 한 칸을 죄다 칠판으로 설치하게 된 것이다.

"우와... 심지어 분필. 너 목 안 아프냐? 저기까진 어떻게 올라 다니려고."

뉴튼은 신발 아래에 부숴진 분필들을 발바닥으로 밟아 문지르며 허먼을 쳐다봤다. 그의 친구는 한 쪽 다리가 불편했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주제에, 저 높은 칠판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다리도 하나 달라고 했어. 완전 큰 걸로. 이걸로 집 서재랑 똑같다고, 뉴튼."

허먼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뉴튼에게 답했다. 뉴튼은 어렵지 않게 허먼의 서재라는 곳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분명히 빌어먹을 수학 책들과 전공서들, 논문이 천장까지 빽빽하게 꽂혀 있을 것이다. 거기에 두고 사다리를 사용하는 게 분명해. 뉴튼은 허먼이 낑낑대며 그 사다리를 오르는 장면을 잠시 생각했다.

뉴튼은 머리를 긁적이며 허먼에게 답했다.

"그래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나 분필 긁는 소리는 질색인데."

"니가 듣는 그 음악들보다 끔찍할까."

"야, 음악에 이런 말이 있는 거 몰라? B.M, A.M 이라고 말이야. MCR 전과 후로 음악이 나뉘는 ㅡ"

허먼은 뉴튼이 무어라 말을 잇기도 전 다시 지팡이를 들어 짐을 치울 곳을 가리켰다. 뉴튼은 어깨를 으쓱하고 예, 예 하면서 다시 분필과 상자들을 나를 수 밖에 없었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보다 못한 친구 아닌가. 다리도 불편하고... 이 정도면 도와 줄 수 있지 뭐.

뉴튼은 그렇게 생각했다. 허먼은 시종일관 서서는 자기가 정한 배치도를 들여다보며 뉴튼에게 이건 여기에, 저건 여기에 하며 지팡이로 명령하고 있었다. 뉴튼은 확 이 상자들을 내버려두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열렬했지만, 그랬다간 허먼 녀석이 혼자서 다리를 절면서 상자를 바닥에서 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서 그럴 수가 있어야지. 뉴튼은 자신의 배려심에 혼자 감동하며 허먼의 요구대로 짐을 정리했다.

"이 정도면 됐어? 이건 다 뭐야. 이 상자들....설마 분필을 이렇게 몇 상자씩 산 건 아니겠지?"

"아니야. 이건 이케아에서 산 거라고."

"이케아? 뭘 샀길래. 근데 거기 아직도 안 망했어?"

"거리에서 구르던 네가 뭘 알겠냐. 이케아에서 조립식 사다리를 샀거든... 그래. 그것들. 응. 그거나 조립해서 맞춰봐야겠다."

"나도 해보고 싶은데, 이건 내가 하라고 안 하네?"

"너한테 시켰다간 사다리가 무너질 지 어떻게 알아, 뉴튼."

허먼은 다가와서 뉴튼의 어깨를 밀치고는, 바닥에 다리를 펴고 앉아 상자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뉴튼은 으쓱하고는 뒤로 물러나서, 자기 구역으로 걸어갔다. 자기 구역이라 함은, 이 좁은 연구실 내에 그은 금 너머를 뜻한다.

허먼은 편집증에 이어 결벽증까지 있는 것인지, 물론 그것은 뉴튼 가이즐러의 주장에 불과했지만 ㅡ 그는 어쨌든 뉴튼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시끄러운 목소리, 카이주 타투, 괴상한 음악... 그리고 그 무엇보다 카이주 내장을 혐오하는 것 같았다. 카이주 자체도 그렇지만 내장을 더 끔찍히 싫어한다고 뉴튼 가이즐러는 느꼈다. 왜냐하면 허먼은 뉴튼이 카이주 검체 나머지를 가지고 리본을 만들거나, 바닥에 조금 흘린 것 정도로 정말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온 뉴튼은 제대로 만드는 데에 실패해서 곰팡이가 핀 채로 방치된 몇 가지 배지들을 골라 치우고, 용구들을 소독했다. 자신의 데스크 너머로 쳐다본 허먼은 바닥에 앉아서 나무 쪼가리들을 들고 사다리 조립에 열중이었다.

이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저 남자가 뉴튼 가이즐러의 유일한 친분이었다. 허먼에게도 그러했고. 그렇지만 둘의 사이는 도저히 좋다고는 표현하기 힘들었다.

뉴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해부용 카이주 카데바들과 검체 조각들을 보며 잠깐 턱을 괴고 의자에 앉았다. 의자를 뱅뱅 돌리면서 저 하늘만한 칠판 위에서 허먼이 언제 굴러 떨어질까 ㅡ 나 생각하며 킥킥 웃던 뉴튼은 자신의 불온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다리 조립에나 열중한 허먼의 신경을 돋우기로 결정했다.

"어...."

허먼의 근처로 걸어나가서 괜시리 주변을 방황하던 뉴튼은, 허먼 근처에 서서 허먼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허먼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이미 사다리는 거의 조립되어 있었다. 정말로, 길었다. 자신의 키의 서너 배는 되어 보였다.

뉴튼은 몇 번 신발로 바닥을 치다가, 기억하는 곡의 드럼 시퀀스를 신발로 밟으며 허먼을 정신 사납게 만들었다. 결국, 짜증이 난 허먼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뉴튼에게 말했다.

"뭐, 뭐. 뭐. 뉴튼. 바빠, 바쁘다고. 빨리 조립하고 올라가 볼 거란 말야. 천장까지 닿는지도 봐야 하고."

"나 짐도 다 옮기란대로 옮겼잖아, 심심하다고!"

"그럼 카이주 나부랭이라도 껴안고 있던가! 빨리 끝내고 계산식 고쳐야 해. 학습 모델링 결과가 개판이야. 이대로라면 펜타코스트 대장한테 ㅡ"

"우웩."

뉴튼은 헛구역질을 하는 척을 했다.

"대장?!"

"그래. 그래. 펜타코스트 대장한테... 아, 그러니까 바쁘다고. 비켜. 귀찮게 하지 말고."

"뭘 귀찮게 해?! 나는 그냥 앞에 서 있는데 난리람. 그리고 카이주나 껴안으라는 말을 하는데, 나는 카이주를 ㅡ"

"됐다."

허먼은 그새 사다리를 만드는 것을 끝내고, 무릎을 몇 번 털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허리를 굽혀서 사다리를 집어 올리려던 허먼은 다리가 불편해서 사다리를 들어올리는 것이 여의치 않자, 뉴튼을 불렀다.

"뉴튼, 이것 좀!"

"아 진짜. 자기 필요할 때만 찾는다니까!"

뉴튼은 툴툴대면서도 사다리를 집어 올려서, 천장에 닿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올렸다. 허먼과 함께 올려다본 사다리는, 천장에 살짝 닿지 않는 적당한 크기로 조립되어 있었다.

"좋아, 저기에 칠판 앞에 두고... 읏차,"

허먼은 바짓단을 접어 올리더니 지팡이를 고쳐 잡는 것이었다.

"바로 올라가게?!"

"그럼? 어차피 매일 쓸 건데. 저기에 둬봐. 그래. 세워두고 고정해서... 올라가면 되겠지."

"위험하지 않을까? 차라리 내가..."

"너도 이 칠판 쓰게? 자네 쪽에다 만들어, 그럴 거면."

허먼은 차갑게 대답하고는 돌아섰다. 기껏 남이 걱정해 줬더니! 뉴튼은 분노로 허먼에게 다 들리도록 혀를 찬 후 돌아섰다. 남이사, 지팡이를 입에 물고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올라가던, 기어가던 마음대로 하라지. 뉴튼은 슥 뒤를 돌아봤으나, 허먼은 이미 반쯤 기어올라간 상태였다. 꼭 저렇게까지 해서 써야 하나? 그는 혀를 찼다.

허먼은 쉐터돔에서 카이주 출몰 주기 추측 연산을 맡고 있었다. 그는 구형 예거 프로그램을 모두 개발했다고 한다. 처음 뉴튼이 허먼과의 펜팔 인연을 실제 인연으로 만든 것이, 여기 들어오기 조금 전이였다. 글로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자기를 이해할 수 있었던 친구였는데. 놀랍게도 둘 다, 서로를 처음 만나자 마자 서로를 싫어하게 되었다. 쉐터돔에서는 그들에게 하나의 연구실을 배정했다. 허먼은 계산식을 쭉 늘어놓고는 한번에 유추하는 식으로 일을 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처음에는 4절지를 물풀로 붙여 쓰는 방법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카이주 출몰이 그렇게까지 자주 있지 않았기에 그 방법도 보기에는 우스울 지 몰라도 통했다. 뉴튼도 몇 번 해부도를 크게 그리는 데에 허먼의 4절지를 빌리고는 했다. 그렇지만 카이주의 크기도 점점 더 커지고, 출몰 빈도 또한 잦아지고, 복잡해져 가기 시작했다. 결국 허먼은 몇 개의 화이트보드를 줄줄이 세워놓고 프로세스 구조를 그리거나,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불편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이렇게 전면 칠판을 설치하고 만 것이었다.

뉴튼은 그가 어디까지 기어 올라갔는지 보려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까지 높이 올라가지는 못했으나, 확실히 사다리는 잘 조립된 듯 해 보였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사다리를 보며 자신도 한번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도중...

"어ㅡ 어엇!"

허먼이 휘청이고 말았다. 지팡이를 끼고 올라가더니만 지팡이가 사다리 사이에 낀 탓이었다. 그걸 빼내려고 손을 휘적대다가 허리의 무게중심을 뒤로 놓친 탓이었다.

"허먼! 지팡이 놓고 사다리 붙잡아!"

"자, 잠깐만! 지팡이가... 어, 으아....!"

허먼은 지팡이를 붙잡으려다가 구두 밑창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뉴튼은 놀라서 허먼을 향해 무작정 달려갔다.

"내가 받을게!"

"무슨 멍청한 미친 소리를...! 뉴튼! 피해!"

허먼의 지팡이가 먼저 떨어지고 뉴튼은 허먼의 지팡이에 머리를 얻어맞았다. 으악! 하고 소리지르면서 머리를 문지르려던 뉴튼은, 떨어지는 허먼을 붙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팔을 어떻게든 둥그렇게 말았다. 그런데 또 머리 위로 둔통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무게를 못 참은 뉴튼이,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 머리를 붙잡고 말았다.

"아야!!! 내 머리!"

뉴튼의 머리 위에는 허먼의 구두가 위치하고 있었다. 미끄러지던 와중 밑을 디딘 허먼은, 그 밑이 뉴튼의 머리건 말건 몸무게를 실어서 지탱하고 만 것이다.

"야! 허먼!!! 아파! 아야, 아야, 신발 치워. 으악! 너 남의 머리를 막 밟냐!"

허먼은 답지 않게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뉴튼 가이즐러의 머리를 구둣발로 밟는 것을 반복했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뉴튼은 어떻게든 허먼의 발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허먼이 무게를 실은 구둣발을 머리를 돌려서 떨쳐 내려고 했다.

"비켜! 치워!!"

"뉴튼! 지금 움직이면...!"

"어, 어어어어어!"

결국, 그렇게 해서 허먼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 것이다.

다행히 뉴튼에 머리 위에 발을 디뎌서, 높은 위치에 앉아있지는 않았지만, 허먼은 안그래도 불편한 다리에 더 불쾌한 발등 통증을 느꼈다. 많이 아픈 것이 뼈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으..."

신발을 조심스럽게 벗겨낸 허먼은 양말 위로 발등뼈를 문질렀지만, 고통은 계속되었다. 뉴튼은 뒤로 나자빠져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허먼을 보고 기어와서는 놀란 듯이 사과를 했다.

"허먼! 미안해.... 괜찮아? 많이 다쳤어?"

뉴튼은 굉장히 놀란 눈치여서, 자신도 허먼이 떨어지는 와중 함께 넘어져 놓고는, 곧바로 허먼 앞으로 기어왔다. 허먼은 그런 뉴튼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장난을 걸다가 인과응보를 당한 것이지만, 허먼은 외려 뉴튼에게 더 성질을 부리는 길을 택했다.

"너 때문이잖아, 뉴튼 가이즐러!"

"뭐, 뭐라고..."

"어떻게 그 상황에서 혼자 살자고 피하냐? 정말 가면 갈수록 가관이군."

허먼은 혀를 차면서 더 뉴튼을 비꼬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발등뼈가 너무 아팠다. 처음에는 놀라서 제대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새 발등 위로 퍼지는 고통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었다. 허먼은 있는 그대로 죽상을 지으며 뉴튼을 쳐다봤다.

"많이 아파?"

"그래, 이 멍청아. 덕분에 지금 ㅡ"

허먼은 어떻게든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젠장할. 사다리를 들이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다, 뉴튼 녀석만 없었어도...

"우선! 우선은 의사선생을 찾아가자. 설 수 있겠어? 어때?"

"지팡이 가져와, 지팡이.... 젠장! 하필이면 이쪽 다리에."

"멀쩡한 쪽이 부숴진 것보단 낫지! 어떻게 된 거야, 뼈에 금 간 거 아니야... 안되겠다, 허먼. 지팡이로는 안돼. 나한테 업혀!"

뉴튼은 허먼 앞에 쭈그려 앉아서 뒤로 등을 보였지만, 허먼은 코웃음이 날 뿐이었다. 뉴튼에게 업힌다? 아마, 자신의 다리가 질질 끌려서는 부숴진 건지 금이 간 건지 모르는 발이 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잘도 그러겠다. 그냥....그냥 어깨를 좀 내 봐. 그 상태로 일어나 볼게...자, 하나, 둘..."

"허먼! 잠깐만, 잠깐만... 자, 하나, 둘! 아니 내가 업어 준다니까!"

"니가? 하이고, 가다 엎어지지나 마. 자! 으.... 젠장. 젠장."

"많이 아파? 걸어갈 수 있겠어?"

"여기서 얼마나 된다고. 충분해. 가면서 잘 지탱이나 해 봐."

허먼은 뉴튼의 어깨에 기대서 체중을 분산시켜서, 어떻게든 일어났다. 오늘 연구는 공쳤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짜증이 인 허먼은 뉴튼을 째려봤다. 그렇지만 뉴튼은 어떻게든 허먼을 거의 들쳐 맨 채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그의 표정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두 박사가 어깨동무인지, 서로 목을 조르는 모양인지를 하고 쉐터돔 내를 걸어 다니는 것은 정말로,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눈에 띄었다. 결국 사람들에 눈에 밟힌 둘은 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몇 남자 직원의 도움으로 비치된 들것에 실어 옮겨졌다. 허먼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자신보다 10cm은 작은 뉴튼이 매고 가는 꼴이 그들에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게 보였을 것이다. 누워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의무실까지 실려간 허먼은, 뒤에서 허먼! 하고 부르면서 졸졸 따라오는 뉴튼만 아니었다면 더 나았을 거라며 눈을 감았다.


"우선 엑스레이부터 찍겠습니다. 뉴튼, 잠깐만 허먼을 여기 들어올려줄 수 있어요?"

의무실 안에 들어온 둘은, 담당 닥터에게 대강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고, 한 차례 설교를 들은 이후에 검사를 시작했다. 허먼은 혼자 올라갈 수 있다고 했지만, 뉴튼은 겁먹은 채로 허먼의 허리춤을 붙잡고 들어올리려고 했다. 결국 뉴튼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허먼이 그렇게까지 크게 다리가 불편하지 않음을 발견한 영리한 선생은, 뉴튼을 뒤로 물리고 허먼을 올라앉게 했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신 건 아닌가 봐요."

"그렇습니다, 그냥 사다리인 걸요. 제 연구실에 설치한."

"우리 연구실이겠지, 허먼."

"제 연구실이 그렇게 높지는 않아요. 뉴튼만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내려왔을 겁니다."

"계속 그 사다리를 쓰실 건가요? 발등 뼈가 조금 부숴졌어요. 당분간은 무리일 것 같아요. 깁스를 해 드릴 테니 한 5주간은 하고 계셔야 하실 겁니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내밀었고, 미세하게 허먼의 발등 뼈가 조각난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도 큰 부상은 아니었으나, 안 그래도 불편한 다리에 깁스라니... 허먼은 이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5주요? 그간 움직이는 게 영 불편하겠습니다."

"그거보다 좀 더 빨리 회복되실 수도 있죠."

"어떻게요? 제가 식을 도출하는 데 그 칠판은 필수적입니다. 어떻게든 연구는 지속되어야 하지요, 암요. 좀 더 빨리 나을 방법이 있습니까?"

의사는 뉴튼 쪽을 흘긋 보고 허먼에게 답했다.

"최대한 이쪽 다리를 쓰지 마셔야지요. 그러려면..."

"뉴튼 가이즐러 박사의 협조가 필수적이겠죠."


허먼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뉴튼은 신이 나서는 답했다.


"허먼! 내가 도와줄게!"

그 날부터, 뉴튼 가이즐러 박사와 허먼 가틀립 박사의 괴상한 휴전 전선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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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뉴튼과 허먼은 같은 연구실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뉴튼이 할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허먼이 연구를 시작하고 끝내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때, 또 화장실에 갈 때나 식사를 하러 가야만 할 때(다행히도 그는 거의 모든 식사를 자신의 연구실에서 해결했다.) 그의 곁에서 있어야만 했다.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겠다는 허먼에게 기어코 휠체어를 권하던 뉴튼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라는 의사의 조언에 결국 휠체어를 다시 접어 넣어두었다. 허먼은 지팡이를 연구실 안에 놓고 온 것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며 뉴튼에게 고갯짓을 했다. 뉴튼은 뭐가 신나는지 웃음을 만발에 띄며 자신의 옆에 착, 하고 서는 것이었다.

"자, 가자고! 가서 상자들 좀 갖다 버리고, 자네 목발도 챙겨야지."
"넌 뭐가 그렇게 신이 났어?"

허먼은 방금 질문은, 입 밖으로 내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마 뉴튼은 자신이 굴러 떨어져서 다친 걸 보고 우습다고 생각했겠지.

"신이 나다니?"
"그렇잖아. 시시덕대면서 옆에 붙어 있고... 화장실도 너하고 같이 가야 한다고? 차라리 안에서 해결을 하고 말지."
"허먼이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괜찮지! 그런데 냄새는..."

허먼은 순간 얼굴이 붉어져서 뉴튼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네, 네 카이주 장기에서 나는 냄새보다는 안 지독해! 그리고 그럴 일 없어!"

뉴튼은 알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 허먼의 옆으로 와서 자신에게 기대라는 눈짓을 했다. 허먼은 어쩔 수 없이 뉴튼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우선은 연구실로 돌아가야지. 아까 하다 만 계산이 떠오른 그는, 기대서 다리를 절며 돌아가는 내내 그 수식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걸어갈 때 마다 발등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구실로 돌아와서 잠깐 의자에 앉은 허먼은, 엉망으로 어질러진 자신의 연구실 - 아 물론, 뉴튼은 '우리'의 연구실이라고 고쳐 말하겠지만 - 을 쳐다보았다. 아까 사다리를 조립하려던 상자는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고, 뉴튼하고 부딪혀서 떨어지는 바람에 이제 보니 지팡이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젠장. 목발을 지급받던지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의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기에는 허먼은 잠깐 걸어온 것으로도 정말로 발등이 아팠다. 어떻게 되었다는 걸 안 이후로 더욱 아파지는 느낌이다. 다리 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자신이 평소에 느끼는 불편함과는 이질적인 고통이었다. 그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잠시 머리를 감싸고 있던 허먼 앞으로 뉴튼이 부숴진 지팡이를 들고 다가왔다.


"허먼, 이거..."

"그래. 망할. 부숴졌다고."

"미안해, 나는 정말 놀라서..."

무엇에 사과하는 것인지 뉴튼은 연거푸 사과를 했다. 자신이 머리를 밟았는데 피해서? 자신을 받아주지 못해서? 가끔씩 자신의 친구, 아니, 이 망할 천재 과학자, 카이주 그루피 놈은 이딴 식으로 굴었다. 그래, 허먼은 그의 아이 같은 점이 정말로 싫었다.

"됐어, 상관 없어. 다시 사면 되니까. 우선은 목발이라도 쓰면 될 일이고..."

"내가 가져올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목발에도 크기가 있다고, 이 멍청아."

허먼은 자신의 어릴 적, 처음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가 이내 머리에서 지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목발 쓰는 법을 배웠다. 나중에는 작은 지팡이 하나로도 퍽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그 동안 그는 정말로 힘들었다. 다시 목발을 짚어야 하는 건가. 어렸을 때 쓰던 사이즈로는 택도 없을 것이다.

"그럼 다시 가야 하는 거야?"

허먼은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지쳤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또, 방금 걸어온 길을 다시 뉴튼한테 매달려서 걷고 싶지도 않았다. 허먼은 의자를 한 발로 끌어 움직여서는, 자신의 책상으로 이동했다.

"됐어... 그건 내일. 오늘은 그냥 하던 일이나 할래."

"괜찮겠어?"

"칠판을 밑에만 고작 쓰는 거라 짜증은 나지만, 뭐... 발로 계산하냐. 여차하면 머리로 대강 때우면 되지 뭐."

"자네가 정말 수학 하나엔 머리가 잘 굴러간다니까. Matlab이라도 쓰지?"

"나는 초기값 계산은 머리로 하는게 낫더라고요. 손으로, 영 그런 것들은 취향이 아니라서.... 너도 네 연구에나 집중해."

허먼은 싸늘하게 대답했지만, 뉴튼은 신나서는 뒤돌아서 카이주 더미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저 카이주 그루피 놈... 아까 싱글벙글하던 이유는 카이주 더미로 되돌아갈 수 있으니까 – 라는 한심한 이유였던 게 분명하다. 허먼은 뉴튼에게 이내 관심을 끄고 계산에 집중했다. 불편했지만 다시 노트 위에 쓰면 될 일이니 크게 거슬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이 고대하던 칠판의 첫 설치 일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는 불쾌한 기분으로, 어떻게든 숫자 속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렇지만 계속 자신의 발목 아래로 느껴지는 고통을 지울 수는 없었다. 슬쩍 시계를 올려다 본 허먼은, 이미 저녁 6시인것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 택배를 받고, 조립하고, 설치하고... 그러다가 이 사단이 나서 의무실에 다녀오고. 그러던 사이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점심도 대강 건너뛴 허먼은 슬슬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질 지경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뒤를 돌아서 뉴튼 쪽을 바라본 허먼은, 뉴튼이 웬일로 이어폰을 낀 채로 배지 선별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망할 스피커로 시끄러운 80년대 음악을 틀어댔기 때문에, 그것으로 곧잘 그와 싸우고는 했다. 제발 음악을 들을 거면 이어폰을 착용해달라고 거의 빌다 못해 나중에는 폭력까지 행사했던 허먼은, `이어폰을 끼면 베이스가 묻힌다고!` 라는 주장을 하는 뉴튼에게 더욱 더 지팡이를 휘두를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웬일로 그가 이어폰을 착용한 채로 집중하고 있던 것이다.

"뉴튼."

혹시나, 하고 뉴튼을 불러보았지만 그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의자를 움직여서 뉴튼 앞까지 주르륵 하고 이동하기에는, 뭐랄까. 좀 많이 그랬다. 그렇지만 그는 식사를 하고 와야 오늘 남은 업무를 정상적으로 끝마칠 수 있다는 계산이 명백함을 느꼈기에, 다시 한번 뉴튼을 불렀다.

"뉴튼!"

뉴튼은 아직도 배지를 잔뜩 손에 쥐고 현미경을 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허먼이 무어라 말한 것을 들은건지 잠깐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검체 냉장고로 향하는 것이었다. 결국 허먼은, 의자 밑 바닥을 발로 걷어 차서, 뉴튼 쪽으로 움직여 갈 수밖에 없었다.

"워, 어어! 허먼! 뭐 해? 드리프트?"

허먼의 의자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것을 본 뉴튼은 놀라서 이어폰 한 쪽을 뺐다. 의자 위에 앉는 허먼의 뒤통수만 뾰족하게 튀어나와 보였다.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은 건가, 하고 허먼의 의자를 돌리자 허먼은 그대로 뉴튼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

"아야!"

"몇 번을 불러!"

"으악, 미안, 미안. 음악 듣느라고 몰랐지....그런데! 너 오늘 대체 사람을 몇 번 때리는 거야?! 아프다고!"

"식사 하러 가자고!"

"밥? 웬일이야. 시간이... 워, 벌써 이렇게 됐나? 그래. 그러자고. 잠깐.... 그런데 목발도 없는데 어떡하지?"

허먼은 잠시 목발을 맞추러 의무실에 들렀다가 그 후 다시 식사를 하러 간 후 연구실에 돌아오는 것이 지금의 체력으로 가능할지 셈해보았다. 답은 명백했다. 불가능. 그렇다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오늘 연구를 접거나, 굶고 어떻게든 해 보거나. 뉴튼 가이즐러 놈보고 나를 업던지, 들쳐 매던지 한 채로 식당에 가라고 하거나. 허먼은 마지막 방안을 골랐다.

"의사 선생이 네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했잖아. 나 좀 도와줘."

"식당까지?"

"그래, 제기랄. 좀 기댈 테니까 잡아주면 걸을 수 있겠지."

"목발부터 받으러 다녀오는 게 낫지 않아?"

"나한테 맞는 크기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적당히 의사 선생이 맞춰다 주겠지. 따로 연락이 없는 거 보면, 지금 갖고 있는 사이즈로는 안 되는 게 분명해."

"하긴... 그래도... 식당까지는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내 생각에 자넨 여기 앉아 있고, 내가 식판을 갖고 올라오는 게 낫겠어!"

허먼은 잠시 고민하다가, 뉴튼 가이즐러가 식판 두 개를 들고 식당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무언가 의심을 받을 게 분명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숨겨둔 카이주 밥을 준다거나,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게 뻔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본다면.

"괜찮다니까. 카이주 냄새 나는 데서 밥 먹기 지겨워."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어깨 정도는 빌려줄 수 있지!"

"웃기는 소리 하네, 내려가자고."

"그래!"

허먼은 뉴튼의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두른 채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럭저럭 버틸 만 한 고통에 그는 한번 더 결심한 후 연구실을 나섰다.

 

한참을 뉴튼에게 기대 걸었을까, 결국 식당으로 향하려면 철제 계단들을 내려가야 했다. 쉐터돔 내의 저녁시간에 식사를 내려온 것은 간만이다. 몇 사람은 허먼이 왜 뉴튼에게 기대 있는지 물었다. 뉴튼은 그냥 '지팡이가 부숴져서'라고 얼버무렸다. 멍청하게 장난을 치다가 자기 사다리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말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나았다. 허먼은 식판을 받아들고는 아무 자리에나 앉았고, 붐비는 식당 내에 자리가 부족했기에 뉴튼은 한 사람 건너편에 식판을 두고 앉아야만 했다.

"간만에 이렇게 내려와서 둘이 밥 먹는 것 같아!"

그렇지만 그는 허먼과 자신 사이에 누가 앉아있건 말건, 입 안에 토마토를 쑤셔 넣고 말을 걸었다. 허먼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뉴튼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항상 이런 식이다.

"밥 먹으면서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아 ㅡ 그래도! 거의 몇달만 아닌가, 웬일로 배가 고파졌어? 역시 사다리 조립을 내가 했어야..."

"시끄럽다고."

허먼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답하고 식사를 급히 마치기 위해 샌드위치를 잘라 포크로 찍었지만, 옆에 앉아있던 사람 (아마도 정비공인 듯 했다)은 둘을 보며 한 마디를 얹는 것이었다.

"박사 선생들 아니오?"

"네. 그래요! 뉴튼이라고 불러요, 우리 엄마밖에 박사라고 안 하거든!"

"...."

"허먼! 인사 좀 해!"

"죄송합니다, 식사 중이어서요. 예. 허먼 가틀립 박사 ㅡ"

"허먼이라고 불러요!"

"뉴튼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허먼이 잔소리를 잇기도 전에 뉴튼은 토마토 하나를 더 입에 쑤셔 넣고, 즙이 다 튀는지도 모르고는 답했다.

"이렇게 나와서 먹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얼마나 좋아!"

허먼은 안경 위로 토마토 즙이 튀어서, 거의 폭발 직전이었지만 인내심을 갖고 참은 후 안경을 닦기 위해 벗었다. 정비공은 그러냐고 답하고는 자기 소개를 하고, 식당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고 답했다. 그야 그렇겠지. 밥 먹는 데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어깨 위에 지워진 짐이 아주 컸다.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는 ㅡ

"이 친구가 빼빼 말라서는 밥도 제대로 안 먹죠! 그래서 저도 덩달아 연구실 신셉니다. 이러다 카이주까지 주워먹게 생겼어요!"

정비공은 허허 웃었지만, 허먼은 뉴튼이 자신을 '빼빼 말랐다'라고 표현한 데에 무어라고 말을 얹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정비공인 남자의 말이 더 빨랐다. 그는 허먼과 뉴튼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까도 거의 끌어안고 오시더만, 따로는 식사도 안 하나 보우. 두 박사님 사이가 절친하시네."

이번에는 허먼은 화를 참지 못했다. 허먼은 멀쩡한 발로 뉴튼을 걷어 차고 정비공에게 잘못된 정의에 대한 수정을 한 마디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는 타이밍을 놓쳤다. 뉴튼이 몇 초 더 빨랐던 것이다.


"그럼요!"

"제 하나뿐인 친구인데요! 이 친구가 저래 보여도 수학을 잘해요! 그거 하난 인정해요. 저 친구가 수학적 두뇌가 뛰어나."

저 말을 듣고 허먼은 무어라 화를 내려던 것을 안으로 짓씹을 수 밖에 없었다. '친구', 친구 같은 소리하네. 그래, 친구. 친구라...

사실은, 그에게도 친구라고 칭할 사람은 뉴튼 가이즐러 한 사람뿐이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차마 입 밖으로도, 아니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뉴튼을 친구라고 칭할 수 없었다.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가 싫어서? 그렇지만 뉴튼은 오늘도 자신이 굴러 떨어질까 봐 달려오고선, 자신이 머리를 밟다가 떨어진 것인데도 자신의 안부부터...

그런 생각을 허먼이 속으로 하는지 모르는지, 정비공은 한 마디를 더 얹고 만 것이다.

"남자 친구입니까?"

결국 이번에는 정말로 허먼이 폭발하고 말았다.

"아뇨! 젠장! 빌어먹을! 헛소리 마시오, 선생!"


허먼이 크게 소리지르는 바람에, 주변의 몇이 그들을 돌아봤지만 다행히도 워낙 시끄러운 식당 안이라 이목이 집중되지는 않았다. 정비공은 식사를 마쳤는지 어깨를 으쓱하고 그저 일어날 뿐이었다. 뉴튼은 뭐가 우스운지 깔깔 소리를 내면서 "허먼! 남자 친구래, 남자 친구! 으하하!" 하면서 식탁을 치면서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이었다. 허먼은 돌아갈 때 조차 저 자식의 어깨에 반쯤 매달려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차라리 다리 한 쪽도 같이 금이 가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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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오늘이 최악의 하루이건, 카이주가 100마리 나타난 날이건, 뉴튼 가이즐러와 남자 친구냐는 둥 소리를 들은 날이건. 허먼은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추측을 위한 접근법은 복잡했고, 허먼은 이 일에 수 년을 수작업을 통한 개발로 자신의 인생을 말 그대로 그의 연구에 바쳤다. 허먼의 추측 알고리즘은 훈련과 추론으로 구현해야만 했는데,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지식을 넘어가는 결과를 도출해야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심층 신경망을 다루는 일은 아주 복잡했고, 단순한 계산 실수부터 레이어 가중치 값, 빌어먹을 훈련 과정까지 아주 길고 지루한 작업 안에서 몇 가지 말도 안 되는 요소들만으로 계측치는 미친듯이 값이 튀어 댔다. 바이두의 중국어 음성 인식 모델 하나를 훈련하는데 무려 4 테라바이트의 훈련 데이터와 20 엑사플롭스의 연산이 필요한 것을 생각해 보라. 허먼이 하고 있는 카이주 예측 알고리즘 모델은 지금의 장비로는 애초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부족한 GPU를 자신의 머리로 대신했다. 마치 생명을 깎아내서 연구하는 사람처럼 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하루라도 틀린다면? 좌표계에서 잘못된 곳으로 예거들을 보낸다면? 인구 절멸이다.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의 목숨이 그에게 달려 있다고 말해도 무방했다.

허먼은 결국 다시 뉴튼에게 기대 다리를 평소보다 많이 절면서 연구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밤은 아주 피곤한 날이 될 것이다. 평소보다도, 더욱 더. 허먼은 칠판 아래 길게 늘어놓은 수식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식사를 하러 가는 데에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바람에, 작업이 밀린 것이다. 오늘은 빨라도 새벽 2시, 아니다. 모델 크기를 생각하면 3시가 넘어서일지도... 그는 하루에 적어도 3시간은 자려고 했지만 그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 신경망을 훈련시킨 후, 연산이 끝날 때 까지 잠깐 쪽잠을 자는 정도로 보충은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절대적인 수면시간은 부족했다. 


뉴튼은 그나마 허먼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카이주에 대한 연구만을 지속하면 될 테니, 카이주 그루피인 그에게는 그렇게까지 나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허먼도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직업과 연구 주제, 자신의 지성을 사랑하지만.... 여하튼 간, 피곤한 것은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봉급을 잘 받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탓하거나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새 시계는 10시를 넘겼고, 뉴튼은 하품을 한 번 하며 배지를 정리했다. 오늘 처리할 카이주 더미는 다 끝낸 것인지, 뉴튼은 칠판에 머리를 박고 있는 허먼 뒤로 다가왔다.

"좀 어때?"

"아직 멀었어, 여기서 좀 더 가중치를 바꾸던지...어떻게든 해 봐야 해. 계측 값이 형편없어. 이렇게 학습 모델을 만들었다간 제대로 훈련도 안돼."

"내가 좀 봐볼까?"

허먼은 뉴튼의 이런 점이 싫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천재였다. 물론 허먼이 하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뉴튼도 자신의 주석 몇 줄을 보고 파악할 시간을 주면 훈련 모델 정도에 몇 줄의 훈수는 둘 자격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점이 죽도록 인정하기 싫었다.


"나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허먼은 차갑게 대답했지만, 뉴튼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아픈데 일찍 들어가는 게..."

"발등 뼈 좀 부순 거로 사람이 죽냐. 너부터 들어가 봐. 난 내 할일 하다 알아서 정리하고..."

젠장, 알아서 정리하고 들어갈 수가 없지 않지 않은가.

".... 전화할래?"

"뭐라고?"

"끝나면 전화해. 그러면 데리러 올게."

뉴튼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이미 10시를 넘긴 시계를 보며 허먼은 뉴튼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 늦을 것 같은데. 오늘, 할 일이 밀렸거든. 누구 때문에."

일부러 비아냥댔지만 뉴튼은 다시 특유의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자다 일어나면 돼지 뭐. 배양시킨 것들 상태도 볼 겸."

허먼은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만 그는 차마 뉴튼을 마주보지는 못 했다.


뉴튼이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간 후, 이상하게도 작업에 속도가 붙은 허먼은 조용한 연구실 내에서 시계 초침 소리를 음악 삼아 작업을 지속했다. 임베딩한 후 매트릭스를 대강 완성한 허먼은, 뉴럴 네트워크 내 학습을 돌리며 잠시 의자에 기대 커피를 마셨다. 선 학습된 매트릭스들의 값을 몇 개 확인한 허먼은, 다행히도 길어야 2시 내로 오늘 작업을 끝낼 수 있다고 계산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벌써 비워낸 커피잔만 3잔일까, 쌓여서 얼룩진 컵을 내려다보며 허먼은 의자에 머리를 좀더 기댔다. 그렇게 잠깐 기대어 있다가 그는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오늘 하루가 그에게는 정말 길었다. 그렇게 잠깐 선잠이 들었을까, 허먼은 설핏 드는 요의에 잠이 깼다. 무심코 의자를 붙잡고 일어나려던 그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젠장.'

커피를 여러 잔 마신 탓일까. 화장실,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이미 뉴튼을 부르기에는 조금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연구실에서 잠을 자는 일이야 흔했고, 어줍잖게 의자에 기대서 잠이야 청할 수 있겠지만 이건 문제가 달랐다.

뉴튼을 불러내야 하는데, 연락처로 연락을 하자니 사실상 뉴튼과 이런 식으로 따로 전화를 한 적은 거의 없음을 깨달았다. 뉴튼과 편지를 주고받은 이후, 따로 연락을 얼마나 했었던가? 메일 몇 통을 보내거나 직접 만나고 말았지. 뉴튼에게 따로 전화는 커녕, 단편적 인사조차 메시지로 남긴 적이 없었다.


우선 메시지라도 남겨 볼까, 고민하던 허먼은 그냥 뉴튼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젠장할, 안지가 몇 년인데 그 자식의 개인 번호조차 외우지 못 했다.

 

몇 번 송신 음이 들렸을까,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뉴튼."

"누구.... 뭐야, 이 시간에. 허먼? 허먼이야?"

"그래....젠장, 나라고."

"자네 전화도 있었던가? 하긴, 다 지급이 됐었지. 나 여태 네 전화 처음 받아 봐."

"...지금, 급하다고...."

"뭐가? 연구 끝났어? 데리러 갈까? 와... 이거 방금, 조금"

"급하다고, 뉴튼!"

허먼은 정말로 그냥 뉴튼이 빨리 와 주기를 바랐기에,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뉴튼은 전화 너머에서 순진한 목소리로 다시 간드러지게 묻는 것이었다.

"뭐가?"

"그러니까!"

"급하다고 했잖아! 빨리 와!"

도저히 화장실이 급하다는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할 수 없던 허먼은 그대로 뉴튼에게 윽박지르고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후회했으나, 뉴튼이 금방 올 거라고 왠지 확신한 허먼은 그대로 의자에 조금 웅크려서 앉았다.

뉴튼이 오면 그 자식한테 매달려서 화장실까지 가야 하는 건가. 젠장. 지팡이만 멀쩡했어도. 그럼 소변을 눌 때는 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역시 아까 어떻게든 낮은 목발이라도 다시 얻어왔어야 했는데. 의무실 운영시간 안에 가서 얘기를 해 볼걸. 지금이라도 뉴튼을 불러다가... 젠장,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허먼은 더 요의가 심해짐을 느꼈다. 이건, 정말 심각했다. 심각함 그 자체!

"허먼!"

연구실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뉴튼이 들어왔다. 뛰어 온 건지 땀까지 맺힌 채로 고질라가 그려져 있는 멍청한 잠옷을 입은 뉴튼은 허먼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 어디 아파? 다리가 불편해?"

"........아냐."

"그럼? 급하다고 하길래...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 나도 의대 나온 건 아니어도 어지간한 건 다 해. 내가 간단히 보고 진짜 안 좋은 거면 의사 선생을..."

"아니라고, 그런 거. 급하단 건..."

"그럼?"

"그건!"

허먼은 뉴튼을 올려다보고 말하려다가 이런 식으로 뉴튼을 올려다본 적이 없어, 어색함에 눈을 데룩 굴렸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허먼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말을 하고 말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아마, 이게 허먼 가틀립이 뉴튼 가이즐러에게 말한 것 중 제일 솔직한 말이었을 것이다.


결국 뉴튼의 부축을 받아 거의 끌려가듯 화장실까지 간 허먼은, 몇 번의 옥신각신 끝에 그냥 혼자서 화장실 칸 하나 안에 들어가는 걸 택했다. 내가 눈을 감고 있을게! 뒤돌아서 어떻게 하면 되지 않을까? 등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뉴튼과 지금 내가 생리적 욕구 하나 해결하자고 이 자식한테 이런 꼴을 보여야 하나 하는 허먼의 신경전이 길게 이어지기에는, 그의 그 생리적 욕구가 너무 강했다.

뉴튼에게 밀려져 어영부영 앉아서 해결한 허먼은, 잠깐 그대로 지금 밖에서 기다리는 뉴튼 녀석을 문을 세게 밀어 기절 시킬 수는 없을까 ㅡ 하는 상상을 하다가 다리를 툭, 바닥에 떨궜다. 그래도 이 시간에 자신의 화장실 문제로 여기까지 달려와 주는 사람은 뉴튼 가이즐러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허먼, 다 쌌어?"

"쌌어가 뭐냐. 쌌어가. 말 좀, 제발. 뉴튼."

"어... 다 해결했어? 그럼 싼걸 쌌다고 하지. 뭐라고 하냐."

"그래. 다 했다. 문 열거니까 비켜봐. 부딪힐라."

"와...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 처음인데? 역시 내 정성스런 간호 때문에 좀 보는 눈이 달라졌지? 어때!"

"잘도 그러겠어. 문 연다."

허먼은 뉴튼의 장난기 어린 말에 결국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자신의 단 하나뿐인 친구였다.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멋쩍고, 그렇다고 이 자식 하나 외에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이럴 때 뉴튼 외에는 기댈 사람이 없다는 말이지.


"돌아갈까? 연구실. 나도....음, 그래. 하던 거 마저 하고 그럼 좀 있다가 들어갈게."

그게 자신이 다시 움직일 일이 있을까 배려한 말임을 느낀 허먼은, 이번에는 뉴튼에게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았다. 뉴튼의 내민 손에 체중을 조금 실어서 기댄 후 그는 대답했다.


"그래, 돌아가자. '우리' 연구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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